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8부 밤골목에서 시작된 긴 대화

밤은 깊어가고 있었지만언덕마을은 여전히 조용했다가로등에 비친 벌레의 그림자만이 벽에 아른거렸고멀리 항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조차오늘따라 무기력하게 퍼져나갔다 비가 오지 않았지만두 사람의 마음에는여전히 스며드는 습기가 남아 있었다서이와 우진은 계단 아래 비가림 포구에 나란히 앉아잠시 말을 잃은 채서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어색함을 넘어서는묵직한 공감에 가까웠다서로의 상처를 마주한 후그 상처를 처음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7부 우리는 같은 상처를 가진 이웃

장우진은 터미널에서 본 예약 명단의 충격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언덕마을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비는 오지 않았지만마음 안에서 내리는 비는 멈춘 적이 없었다 계단을 오르며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을 떠올렸다 언젠가부터지현과의 대화는 짧아지고감정은 얇아지고밤이 깊어져도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아내는 피곤하다는 말로 모든 걸 덮어두었고우진은 그 말 뒤에 숨은 감정을 끝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6부 예약 명단에서 본 두 사람의 이름

장우진은 그날도 야근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방송국을 나섰다비는 오지 않았지만 공기에는 습기가 묵직하게 남아 있었다항구 도시 특유의 끈적한 바람은사람의 몸뿐 아니라 마음마저 축축하게 만든다는 것을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버스를 타지 않고 언덕마을까지 걸어가기로 했다어디론가 가버린 집중력대본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활자들아내가 새벽 근무라며 남긴 짧은 메모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여그는 처음부터 걷는 것이 맞다는 듯천천히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5부 초록 스카프와 파란 만년필

비는 멈춘 듯하다가도 다시 내렸다언덕마을의 하늘은 어느 순간부터 우산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계절에 들어섰다시멘트 벽에 그대로 배어드는 비 냄새빗물이 고여 반짝이는 계단가끔 누군가의 신발이 미끄러지며 좁은 골목에 작은 파문을 만들고그 파문 속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자신의 일상을 이어나갔다 서이는 어느 날퇴근 후 집 안 작은 화장대 앞에 앉아 스카프를 펼쳐보았다초록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얇은 소재의 스카프남편 민석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4부 각자의 결혼이 조금씩 어긋나던 때

언덕마을의 아침은 늘 같은 소리로 시작되었다빨래를 터는 소리옆집 문이 열리는 소리출근하는 아저씨들의 가벼운 발걸음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그 익숙한 소리들 사이에서서이와 우진의 삶은 조금씩겁나게 작은 틈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서이는 출근 준비를 하며 부엌 테이블에 앉았다서랍에서 남편이 준 초록색 스카프를 꺼내 목에 천천히 두르는 동안얼마 전 분식집에서 우진과 마주쳤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조용하고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3부 비가 오는 날마다 같은 자리

비는 계절의 경계를 지우는 방식으로 내렸다여름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내리는 비는 단순히 땅을 적셔놓는 수준이 아니라세월과 기억을 덮어버리는 듯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언덕마을은 그 비가 올 때마다 숨을 고르는 것처럼 고요해졌다 이곳에 살아본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비 오는 날 언덕골목의 소리는 묘하게 사람 마음을 흔든다고발자국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계단을 내려가는 물소리가 오래 머무른다그리고그날 그 시간에 만나지 않던 사람들이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2부 분식집에서 처음 마주친 얼굴

언덕마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오후 다섯 시쯤이었다바닷가 근처라 그런지 이 동네는 유난히 비가 자주 내렸다그리고 비가 오면 어김없이 골목 아래 분식집 간판에 노란 불이 켜졌다가게 이름은 빛바랜 페인트로 적힌 미정분식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근처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그리고 이 동네에 오래 살았던 주민들에겐 익숙한 장소였다 한서이는 회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자동으로 우산을 펴고 골목을 내려갔다언덕 꼭대기에서 아래까지 이어지는 … Read more

비가 그치지 않던 골목에서 – 1부 이사 오는 날 언덕 위의 두 집

1997년 늦봄의 인천은 유난히 습기가 많았다계절이 여름으로 기울어가는 길목에 서 있던 그 해의 바람은 바닷가 비린내를 머금고 언덕골목을 천천히 오르내렸고그 바람 속에서 오래된 벽돌집들은 한숨을 토하듯 낡은 기와를 흔들었다그날 아침 언덕 아래로부터 차 한 대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섰고이삿짐센터 직원들이 허리를 세우며 문을 열었을 때한서이는 물컵을 들고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조용히 눈을 가늘게 뜨며 그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30부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에서

모든 것이 끝난 후세상은 완전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심연극장의 마지막 파편도 사라졌고어둠의 긴 복도도흰 도시의 숨결도기억의 바다도모두 빛 속으로 흡수되어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오직 하나의 존재뿐이었다. 유라도리테도리세도 아닌새로운 이름새로운 몸새로운 마음세 사람의 모든 길이 합쳐져 탄생한‘하나의 존재’. 빛이 완전히 가라앉자그 존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온기와 깊이희망과 절망사랑과 두려움모든 감정을 품고하나의 심장이조용히 뛰기 시작했다. 그 … Read more

그림자 항로의 남쪽 끝 – 29부 모든 길이 합쳐지는 빛의 항로

검은 실이 폭발하듯 튀어나와 세 존재를 덮쳤던 순간,심연극장은 사라지고도시도 사라지고바다 절벽 아래의 안개도 사라지고세상 전체가빛과 어둠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간으로 변했다. 그 공간 안에서유라리테리세세 존재의 몸이더 이상 몸이라고 부를 수 없는 빛의 파편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파괴가 아니라합쳐지기 위한 과정이었다. 세 감정의 형태가 무너지고변형되고흐르고뒤집히고서로를 향해 흘러들어가는 과정. 유라는 처음으로리테와 리세가 느껴온 모든 감정을그대로 느끼기 시작했다. 리테가 … Read more